고등학생 시절부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에 흥미가 많았습니다.
굳이 말하면 저는 성선설의 신봉자에 속합니다. 이유는 그냥 성악설이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선설과 성악설은 사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의 선인가 악인가를 분석하고 밝혀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과 악은 하나의 가정일 뿐이고,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동양철학에선 성선설과 성악설이 각각 유가와 법가 사상으로 연결됩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이냐 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고 덕으로 다스릴지, 아니면 법으로 통제해야할지가 사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의 본질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막연히 성악설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당연히 그때는 고등학생이었고, 제가 학생이었을 시절은 체벌이 당연한 시대였습니다. 인간은 욕망의 노예이고 가만두면 나쁜짓을 하니 두드려 패서 고쳐놓아야 한다. 라는게 기본적인 교육 이념이었습니다.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성악설이었죠.
이런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저는 여러가지 가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중 하나는 생물학적인 본성이 아닌 사회적인 본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체의 욕구는 그 생명체의 생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에, 생명체가 욕구를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타적 행위는 어찌보면 개체의 생존과는 배치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는 존재가 우연히 모여서 무리를 형성하였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마도 서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싸운다면 금방 무리는 해체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리를 이루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면, 더 큰 목적을 위해서 눈앞의 작은 손해를 감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회화 과정이 이루어진다면, 반대로 그것이 본성이었던 것처럼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조금 부연설명을 하자면, 저는 생명체가 하나의 일관된 체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체란 살고자 하는 존재들인데, 그 살려고 하는 주체는 하나가 아닙니다. 유전자 입장에서의 생명과, 세포 입장에서의 생명, 하나의 기관의 생명, 개체로서의 생명,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생명, 사회, 인류.. 서로 입장이 다른 여러가지가 모여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서로 상충될 수도 있습니다. 유전자는 어쨌건 자기복제를 많이 해서 오래 지속하면 되지만, 생물학적인 개체는 수명이 다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개체가 생존을 유지하는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만, 어떤 사람은 자손 번식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것들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때때로 인간의 사상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신념을 위해 생물체로서의 목숨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철학을 가진, 혹은 세뇌된, 인간은 자신의 생명보다도 믿음을 소중히 여기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저는 대학생 4학년 때 쯤 이런 정신적인 것들이 바이러스와 비슷하다고 느껴서 정보 바이러스라는 개념을 생각해 봤는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정보 바이러스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제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였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이 많은 것도 제 안의 정보(지식, 사상) 바이러스들이 자기복제와 전파를 하려고 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이타심이 가능하냐고 한다면 가능합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어쨌건 꼭 인간이 선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대단한 학설이 나왔으니까요.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그 시기보다 너무 먼 미래에 살고 있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이 것은 너무나도 혁신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기존의 인간의 본성과 통치철학은 인간에게 선한 본성이 있기에 본성을 확충하여야 한다 라는 주장과, 인간이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에 그 욕망을 통제하지 않으면 사회가 무너진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솔직히 성선설도 인간을 선이라는 패러다임의 틀에 가두었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존중한다고 보기엔 어려워보입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의 주장은, 설령 인간이 욕망을 가진 존재일지라도, 그의 이윤추구 행위가 반 사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인권 국가에 살고 있기에 당연히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행복 추구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전히 개인은 국가를 위한 존재이고, 국가 발전에 도움 되는 행위만이 올바른 행위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개인은 그저 국가의 부속품 취급 당하고, 행복한 삶 따위를 추구하는 것은 사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뒤집기 위해선, 인간을 목적으로 여기는, 행복 추구권을 당연시하는 가치관이 있어야 하지만... 약간의 타협책으로서, 인간에게 자율을 주어도 사회에 해악만 끼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결론..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본성이 선이냐, 악이냐? 가 아니라, 인간에게 자율을 허용할 것인가, 통제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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