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무엇인지 말하기도 쉽지 않지만, 독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네요.
일단 약은 병을 예방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는 물질(혹은 물질 이외의 무언가)이라 해보죠.
그럼 독은 무엇이죠? 사람을 해치는 물질?
그냥 쉽게 생각하면 저 정도로도 말할 수 있긴 한데,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참 어려워집니다.
일단 물질 자체에 약과 독이라는 구분이 명확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약과 독은 본디 별개가 아니고, 용량의 차이이다.
이 말도 완벽하진 않지만 맞는 말입니다. 어떤 물질이라도 과도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말은 좀 더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약 이라는 물질과, 독이라는 물질은 없습니다.
그건 그냥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신약개발에서 중요한 관점입니다.
망치라는 연장을 생각해봅시다. 못을 박는데도 쓸 수 있고, 무언가를 부술 때도 쓸 수 있습니다.
물질은 그러한 도구일 뿐이고, 상황에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 약이나 독이 되는 것입니다.
약물은 신체를 조절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치유되는 것이지, 무조건적인 치유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 아프다고 배탈약 아무거나 먹는다고 낫지 않습니다. (제가 올해 배가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병이라는 것을 신체가 정상상태에서 교란된 상태라고 생각한다면, 약은 그 교란을 원래대로 돌려주는 물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도구일 뿐인 약물은 "정상"이라는 관념적인 방향으로 상태를 밀어주는 것이 아니고, 저해제나, 작용제나 길항제 등... 약물 특성대로의 기능으로 작동할 뿐입니다.
약은 결코 게임에 등장하는 힐링 포션처럼 뭔가 인간의 자연 치유력을 향상하는 마법 같은 물질이 아닙니다.
식물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시다. 식물은 다양한 물질들을 생산해냅니다.
기능적으로 생각해봅시다. 그 물질을 왜 생산할까요?
대부분 생명체들은 낭비를 할만큼 여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니 뭔가 필요해서 생산을 하는 것이겠죠.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아니면 자신 이외의 존재에게 사용하거나.
자신 이외의 존재라면, 번식을 위해서 공생관계에 있는 벌에게 꿀을 제공하거나, 동물에게 과일을 제공하거나...
이렇게 좋은 기능들도 있지만, 자신을 먹는 천적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을 생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독의 독성이 의외로 약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물의 타깃이 되는 단백질들 중 대표적인 것이 수용체와 효소입니다.
독들은 이런 수용체를 과활성, 혹은 억제하거나, 효소의 작용을 억제함으로써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정상인에게 과량이 투여되면 생명에 위협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은 특정 환자에겐 오히려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신약개발 사례 중에선 이렇게 독에서부터 출발한 약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독은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강한 산처럼 높은 반응성을 가지고 신체를 부식시키거나 체내 분자를 무작위로 산화시켜버리는 물질도 있지만,
특정 단백질과 결합하여 작용하는 (약과 비슷한) 섬세한 독도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은 후자였지만, 알보칠처럼 전자에 속하는 약도 있습니다.
과산화수소도 활성산소의 일종이지만, 소독약으로 사용합니다.
독은 특정 분자 단위에서 해가 될 수도 있지만, 분자를 파괴하지 않아도 기능을 조절하여 세포에 해를 주거나,
세포를 죽이진 않아도 기능에 이상을 주어 조직이나 인체 단위에서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 신약개발에서도 독성 예측이라는 주제가 있지만, 불안정한 결합 등의 이유로 높은 반응성을 가지는 분자의 독성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도, 후자에 속하는 독은 매우 많은 데이터가 주어지거나, 신체의 메커니즘이 반영되지 않으면 예측이 어렵습니다. 독과 약은 본디 별개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습니다. 질환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약물에 독성이 있다, 없다고 예측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독성이 약의 일차적인 작용일지, 부(side) 작용 일지에 따라서도 다르게 접근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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